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삶의 내용 또한 수많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사회를 이루면서 타자와의 결합을 추구하고 희구하는 것이기에 인간은 타자와의 내적 교감과 교류를 지향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개인적·사회적 병리 현상의 증가, 세대·성별·계층·문화 간 갈등의 증폭을 겪고 있으며, 각종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1세기에 초개인화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관계의 단절과 개인의 고립화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팬데믹을 겪으며 대면의 만남과 접촉, 이동은 제한되었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과 고립은 심화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증오·혐오 현상이 세계로 확장하였다.
이에 개인의 자율성에 기반한 관계 회복은 물론이고, 인간·비인간·자연을 포괄하는 새로운 관계 문화 정립이 요청된다.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소통과 연대, 공존과 상생, 공감과 화합이 필요한 시대이다. 타자와 공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름을 인정하는 소통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또한 ‘소통을 통한 공감’은 나를 타자의 위치로 옮겨 나와 타자 간의 긴밀한 유대와 결합을 맺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다. 공감이 인간성을 회복하고 인류의 공존과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덕목이라면 공감력 함양은 인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소통을 통한 공감 능력의 계발을 위해 인문학은 어떤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인가?
타자에 대한 혐오나 적대감, 전 세계적인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면서 하나의 인류공동체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데에 인문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소통, 공존, 공감을 실현하기 위해 인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근본적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면, 구체적으로는 세계적으로 인종주의를 포함한 각종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인문학이 사회통합과 관련된 정책 수립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통합과 연대를 위한 세계시민 교육에서 인문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성찰할 때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실천을 추동하는 데에 인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이것이 우리가 답하고자 하는 질문이다. 이 시대, 소통, 공존, 공감을 실현하기 위해 폭넓은 사유를 근간으로 한 인문학의 역할이 확장되고 심화되길 소망한다.
인문학은 펜데믹 이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단절과 혐오와 갈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분석하고 소통을 통해 연대로 나아갈 해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타자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 세계적 차원의 인종주의, 다양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미시 권력에 의한 차별 등을 극복하기 위해, 타자성 회복을 위한 인문학의 접근은 무엇이며, 구체적 정책을 수립하고 세계시민 교육을 시행할 때 인문학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절과 갈등의 문제를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 젠더 간, 학문 간 경계 짓기의 현상으로 파악하여 경계를 허물기 위한 탈경계의 인문학을 다시 한번 모색해 보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AI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문학적 성찰과 사유의 도구인 말과 글이 인간의 영역에서 기술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현실에서 말과 글을 통한 인문학적 성찰과 사유의 시효가 남아있는 것인지, 인간이 말과 글을 통해 소통하며 연대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한 것인지,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과연 가능한 일인지 등에 대한 근본적 성찰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의 다양한 분과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영역과 적극적 소통을 통해 포괄적으로 접근하는 융합적 접근도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다시 물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타자는 나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한다. 다른 사람, 동물, 식물, 자연, 기계, 우주가 모두 타자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대면, 비대면 등의 새로운 방식의 관계가 대두되면서 이제 양자 관계가 아니라 3자 이상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먹고, 기르고, 바라보는 식물이 기후 문제와 연결되면 인간과 식물의 관계도 자연생태계 차원의 문제로 확대된다. 한편으로 반려동물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편으로 식용 동물의 대량 생산과 대량 도살이 이루어지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윤리적 성찰도 요구된다. 인공지능(AI), 로봇 등 기계가 인간화하거나 인공반려화하면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재정립되어야만 한다. 인간과 비인간 타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서로 살리면 함께 있을 수 있다. 상생과 공존의 패러다임이 우리가 찾는 대안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인간과 바이러스의 관계, 인간과 동식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서 공존과 상생의 길을 인문학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통의 부재, 차별과 배제, 배척과 혐오 등이 난무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타자와의 공감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되, 서로 공감함으로써 함께 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소통과 화합, 그리고 공감을 위한 조화로운 관계 형성에 중요한 밑바탕이 되는 것은 타자와의 정서적 교감이자 동질성 인식이다. 공감은 인간의 선천적인 능력이면서 한편으로 노력을 통해 계발될 수 있다. 이념, 종교, 인종, 계층 간의 갈등을 초월하여 서로 공감하는 계기가 되고 촉매 역할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놀이와 예술’이다. 또한 놀이와 예술의 기반이 되는 ‘상상력’은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과 집착을 넘어서서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은 예술로 이어지고 예술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세계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놀이와 예술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간과 인간을 조건 없이 하나로 결합하게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는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다. 공감, 상상력, 그리고 놀이와 예술은 나와 타자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유의 근간을 만들어줄 것이다. 상상력의 발현인 놀이와 예술은 인간 간의 소통과 공감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며, 관계 맺기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